2017년 2월 14일 화요일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연혁, 출범,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이데올로기,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헌법,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언론정책,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대군부정책,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붕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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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연혁

Ⅲ.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출범

Ⅳ.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이데올로기

Ⅴ.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헌법

Ⅵ.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언론정책
1. 언론정책
2. 언론동향

Ⅶ.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대군부정책

Ⅷ. 제1공화국(이승만정부)의 붕괴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
Ⅰ. 서론

한국 역사상 단군이래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식시키기 위해 자기희생을 각오한 장면은 틀림없이 소신과 신념이 있는 <정치가>이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간에 붙었다가 쓸개에 붙었다 하는 정치인은 결코 정치가라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장면은 후진국의 정치지도자로서는 부적합한 인물이었다. 일제시대에 그는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다마오까 쯔도무(王岡勉)라고 창씨개명 했다. 그는 그의 뇌리에 한국인으로서의 정신만 정확히 하고 있다면 창씨개명을 했다 해서 일본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지론을 각인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그의 창씨개명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가톨릭 재단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서 창씨개명에 항거함으로써 학교경영의 화 또는 폐교당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결단이었다. 그가 가톨릭 평양교구에서 5년간 봉사할 때 숭실전문학교가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한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훗날 해방 독립을 맞게 되면 창씨개명이 문제가 되어 친일파라 규탄을 받게 될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한 사람이 희생됨으로써 수많은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다행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이 그의 소신이요 지론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고 말한 성서구절을 그는 생의 철학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후진국으로서 특히 한국과 같이 파벌로 분열되어 항상 상호투쟁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심성을 상당히 사악하게 만드는 것인데, 장면이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것도 그의 종교적인 신앙심으로 인한 투철한 종교인으로서의 성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정상적인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때에 따라 격렬한 투쟁도 벌여야 하고 때로는 엄한 질책도 퍼부어야 하나, 장면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결국 지도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흔히 이를 우유부단 또는 무능으로 매도하는 구실을 주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강혜경(2005), 제1공화국 초기 국민통제의 확립, 한국학술정보
◇ 김수자(2010), 대한민국 제1공화국의 지배와 저항담론의 불협화음, 한국민족운동사학회
◇ 백영철(1995), 제1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 나남
◇ 서중석(2007),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 성병욱(2005), 한국 제1공화국 정당체계의 특성, 21세기정치학회
◇ 후지이다케시(2008), 제1공화국의 지배 이데올로기, 한국역사연구회

키워드
제1공화국, 이승만정부, 이데올로기, 헌법, 언론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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